'백색국가' 배제..."첨단장비 R&D, 기업끼리 '썸타야'"
'백색국가' 배제..."첨단장비 R&D, 기업끼리 '썸타야'"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9.08.2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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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레지스트 등 대일 의존도 높은 반도체 소재 직격탄
진입장벽 높은 소재, 장비, 부품 산업...국내 기업 진입 난항
개발부터 양산까지 10여년 걸려...대‧중소기업간 협력 절실
 
이병헌 광운대 경영대학 교수가 '중소기업 소재, 부품, 장비 국산화 R&D 투자확대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이재형 기자)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이병헌 광운대 경영대학 교수가 '중소기업 소재, 부품, 장비 국산화 R&D 투자확대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이재형 기자)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이재형 기자] 일본이 28일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서 주로 일본 부품에 의존하던 국내 반도체 산업에 직접적인 타격이 예상된다. 불화수소, 실리콘 웨이퍼, 포토 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품목의 국산화율은 18.2~50.3%에 그쳐 공급 공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에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27일 서울 코엑스에서 모여 ‘제20회 중소기업기술혁신대전(ITS 2019)’ 세미나를 가졌다. 이날 세미나에선 핵심 부품 국산화를 위해 단순 기술 R&D가 아닌 대‧중소기업간 긴밀한 관계 형성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소재‧부품‧장비 산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경제에서 비중이 커지고 있다. 2019년 현재 소재‧부품‧장비 부문의 생산 규모는 786조원에 달한다. 제조업 전체 생산규모인 1518조원의 절반을 넘는 수준이다. 교역 규모도 2001년 1300억달러(157조6250억원) 수준에서 2018년 5443억달러(659조9637억원)까지 4배 이상 증가했다. 

사실 교역액만 보면 소재‧부품‧장비의 대일 수입 의존도는 높지 않다. 작년 소재‧부품 부문의 총 수입액 1772억달러(214조8550억원) 중 일본발은 288억달러(34조9200억원)로, 전체의 15%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역수지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 작년 대일 무역적자 총액이 244억달러인데 소재‧부품‧장비에서만 224억달러(29조6142억원)가 발생했다. 단순 교역액도 문제지만 질적인 차이와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국내 주력 산업에 대한 파급력을 고려하면 문제는 더 커진다. 

이날 기조발표를 진행한 이병헌 기술경영경제학회장(광운대 경영대 교수)은 소재‧부품‧장비 산업에서 한‧일간 시장구조가 다름을 지적했다. 한국은 시장규모는 크나 기술난도가 낮은 범용제품 위주인 반면 일본의 경우 시장규모는 작아도 각 품목별 점유율이 매우 높다는 것. 한국제품은 대체되기 쉽지만 일본은 고난도 기술을 바탕으로 ‘알짜’ 고부가가치 시장을 확실하게 잡고 있다는 뜻이다. 

한일간 소재, 부품, 장비산업 시장구조 비교.(산업기술진흥원 제공)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한일간 소재, 부품, 장비산업 시장구조 비교.(산업기술진흥원 제공)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일본이 선점한 지위는 진입장벽이 높다는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특성과 맞물려 더 위력적이다. 통상 10년이 걸리는 R&D 기간과 고비용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기업들은 지속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지 못해 대개 시장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다. 

선행 기업이 선점한 특허와 고정 설비 투자비용도 만만치 않다. 니콘은 반도체 웨이퍼나 TFT LCD 유리기판에 회로를 그리는 노광기 사업에 진출했으나 ASML의 Twin Scan 기술 특허로 시장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대체 기술인 ‘나노 임프린트 리소그라피’를 캐논이 개발하고 있지만 4년째 소식이 없다. 

선행 기업이 형성한 정보력도 진입장벽이다. 소재‧부품‧장비 사업은 공급사가 수요 기업에게 공급하는 B2B 거래가 중심이다. 가령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제작에 필요한 고순도 석영을 주문하면 일본 미츠비시 케미컬에서 99.99% 이상의 석영 분말을 공급하는 식이다. 

문제는 반도체 등 공정이 극도로 정밀하다보니 요구사항에서 0.1%만 벗어나도 거래가 무산되는데 있다. 수요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과 공급사가 내놓은 솔루션이 일치하는지 맞추는 데만 수년이 소요된다. 간신히 제품 검증이 끝나도 공급사가 공정 최적화에 실패해 단가가 높거나 납기를 놓쳐도 거래는 무산된다. 공급사들이 특정 수요 기업에 특화하는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발전하는 이유다. 그래서 소재‧부품‧장비 산업은 ‘니치 마켓’이라 불린다.

김동훈 K-TECH 전무는 “반도체에 쓰이는 실리카 소재의 경우, 석영 원료 품질 인증부터 샘플 테스트, 중량 테스트, 웨이퍼 물성 테스트, 대량 평가의 5단계를 거친다. 각 단계 당 1~2개월이 소요되는데 한 단계에서만 문제가 생겨도 처음부터 다시 개발해야 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석영 도가니 제조에는 미츠비시 케미컬에서 제조한 고순도 석영 분말이 주로 사용된다.(K-TECH 제공)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석영 도가니 제조에는 미츠비시 케미컬에서 제조한 고순도 석영 분말이 주로 사용된다.(K-TECH 제공)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이런 환경에서 국내 기업이 어렵게 소재 개발에 성공해도 대기업이 선뜻 거래처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이미 기존 거래처에 요구 성능, 사용 환경, 기술정보를 공개하고 비용까지 최적화시켜놨는데 공급처를 바꾸면 전부 백지화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탓이다. 

기술 개발 기간은 긴데 기술 발전 속도는 빠른 것도 대기업이 거래처를 바꾸는데 압박이다. 보통 소재‧부품‧장비 개발부터 상용화까지 한 호흡이 5년 이상 걸린다. 다년간 조율을 통해 거래처 소재에 맞춘 공정을 마련했는데 양산시기를 놓쳐 경쟁사에 밀리면 고스란히 타격으로 돌아온다. 국내 대기업들이 조금이라도 더 익숙한 해외 업체와 어울리는 이유다. 

김동훈 K-TECH 전무는 “반도체는 개발 속도가 빨라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 애써 개발한 소재가 아무 쓸모없게 될 수 있다”면서 “미세공정의 경우 22나노미터에서 5나노미터까지 발전하는데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삼성은 이미 3나노미터 공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훈 K-TECH 전무가 '반도체용 웨이퍼 기반 재료 국산화를 위한 기술 개발 전략'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이재형 기자)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김동훈 K-TECH 전무가 '반도체용 웨이퍼 기반 재료 국산화를 위한 기술 개발 전략'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이재형 기자)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들도 기술이 아닌 수요기업과의 관계 형성에서 어려움을 토로하며 이에 대한 정부 지원을 촉구했다. 국내에 드물게 나온 국산화 성공사례도 대개 삼성전자 등 대기업과 공동기술개발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전력용 아날로그 반도체 칩 설계 업체 실리콘마이터스는 2009년 PMIC 칩을 국산화해 삼성에 납품했다. 삼성전자 LCD에 들어가는 이 칩은 그간 해외기업 맥심이 공급해왔다. 실리콘마이터스는 초기 개발 단계에선 일방적으로 삼성의 지시를 받다가 부품 규격 단계부터 협력관계로 발전해 정부 주도 공동기술개발 컨소시엄을 통해 사업 추진 탄력을 받았다.

Asher 장비 업체 PSK도 삼성전자와 협력해 사세를 키운 사례다. 초기 일본산 Asher 완성품 장비를 도입해 국내에 공급하던 PSK는 1997년 200mm 웨이퍼용 Asher 장비를 삼성전자와 공동 개발했다. 이후 300mm 웨이퍼용 등 장비로 기술협력을 확대했으며, 현재 하이닉스 등 타 업체와도 거래하고 있다.

이병헌 기술경영경제학회장도 대‧중소기업간 협력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중소기업이 보통 10년 걸리는 소재‧부품‧장비 개발 기간을 감내하려면 △선진기술 모방 △수입대체 △탈추격에 이르는 장기적 기술협력이 뒷받침 돼야한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국내 R&D 사업이 주로 단기‧소액 과제에 머문 점도 문제 삼았다. 대책에는 대기업-중소중견기업-대학 및 연구소를 연결하는 3각 공동체제와 테스트베드 지원을 제시했다. 

산학연 공동연구제도.(이병헌 교수 제공)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이병헌 교수가 제시한 산학연 공동연구제도.(이병헌 교수 제공) 2019.8.28/그린포스트코리아

국내 R&D가 선정 경쟁이 과열됐고 과정에만 치중해 해외의 정부주도 R&D 사업보다 개발성과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극소수 업체에만 기회가 열리고, 또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정된 업체가 이후 불성실하면 지원금만 받고 별 소득 없이 끝난다는 지적이다. 또 과거 채택된 주제는 성과 수준을 떠나서 추후 공모에서 배제되는 문제도 언급됐다. 더 지원이 필요한 주제가 사장된다는 것이다. 

황인기 에너진 전무는 “수소열전지 관련 시스템을 개발하고자 중국을 찾았는데 같은 주제로 여러 R&D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놀랐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과제 진행 과정도 한국과 달랐다. 중국은 일단 많은 업체를 선발해 이후 2차, 3차 검증을 거치는 계단식 R&D를 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정말 사업할 업체만 남게된다”라고 말했다. 

silentrock91@green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