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단상/문예비평] 왜 함익일까? 왜 함익인가
[삼청동단상/문예비평] 왜 함익일까? 왜 함익인가
  • 도현·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0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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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풀어낸 해석, 그 끝에 선 햄릿 그리고 함익
창작극 함익 포스터[출처=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창작극 함익 포스터.(출처=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연극 '함익'의 큰 궁금증 가운데 하나는 ‘함익’이라는 이름의 의미이다.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고전 '햄릿'에서 출발했다는 점과 ‘줄리엣을 꿈꾸는 햄릿’이라는 부제를 단서로 해서 일차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함익’이 ‘햄릿’의 음차(音借)일 가능성이다. 햄릿을 우리나라 이름으로 옮기다 보니 가장 발음이 비슷한 함익으로 썼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는 '햄릿'에서 햄릿의 연인 이름이 오필리어인데, '함익'에서 함익의 약혼자 이름을 오필형으로 쓴 것과 같은 맥락이다.(사랑의 관계성으로 볼 때 함익이 사랑했던 대학생 정연우의 이름을 오필형으로 쓰는 것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수의 대상과의 관계성-복수의 대상과 가까운 사이-을 놓고 바라본다면 작가의 작명(作名)이 정확하다.)

음차라는 일차원적 해석을 넘어서 함익이라는 이름에 극적 의미를 부여할 때 이 작품의 메시지는 먹이 잘 스민 탁본처럼 도드라진다. 함익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함익, 그녀의 이름은 ‘익’. 여기서 ‘익’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풀어내야  비로소 작가 김은성이 이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고전 '햄릿'의 메타연극이라고 설정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물론 함익의 분신, 즉 반쪽이므로 성을 빼고 이름만 썼다는 해석도 타당하지만 이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접근이다.) ‘익’은 날개를 뜻한다. 한자 날개 익(翼). '햄릿'에서 ‘날개’는 복수의 신속성, 복수의 불가피성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 장면은 아버지가 맞이한 죽음의 진실을 햄릿이 알게 되는 '햄릿' 1막5장에 나온다. 유령(햄릿의 아버지)은 자신의 동생(클라우디우스)에게 독살을 당해 목숨과 왕관, 왕비를 한꺼번에 빼앗겼다는 사실을 아들 햄릿에게 알리며 “소중한 네 아버지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이 흉악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다오.(1.5.23~25)”라고 요청한다. 유령의 요구에 대해 햄릿은 즉각적으로 복수를 맹세한다. “서둘러 알려주면 명상처럼 아니면/ 사랑의 상념처럼 재빠른 날개로/ 복수에 돌입할 것이다.(1.5.28~30)” (셰익스피어전집4 '햄릿', 민음사, 2018)

'함익'에서 ‘익’은 ‘함익’에게 줄곧 숨진(타살된 것으로 의심하는) 엄마에 대한 복수심을 일깨우고자 애쓴다. 햄릿의 맹세처럼 ‘날개처럼’ 재빠른 복수를 수도 없이 되뇌는 또 다른 함익이 바로 익인 것이다. 복수에의 충동질. 번민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자신이 더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복수에 나서야 한다는 거듭된 맹세. 함익 내면에 있는 익의 첫 번째 역할, 날개 같이 신속하게 복수하기.  

주인공 함익
주인공 함익

 

이 작품은 '햄릿'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지만, 햄릿이 가진 플롯에서 벗어난 다른 이야기라고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씬플레이빌, 2019.4) '햄릿'을 읽는 다양한 시각 가운데는 ‘복수에 집중하는 서사구조’라는 해석 못지않게, 복수에 이르기까지 햄릿이 겪는 혼란한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 또한 적지 않은데, 작가는 햄릿의 심리에 집중하는 이야기 전개를 택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햄릿'에서 비켜나와 '함익'은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을까. 작가 김은성은 “완벽하게 잘 만들어진 복수의 서사를 배후로 밀어내고 행간에 숨어 있는 햄릿의 심리에 주목했다”고 했다. 복수극 뒤에 숨어 있는 햄릿의 섬세한 심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작가가 해석한 두 인물의 고독의 층위는 같으면서 엄연히 다르다. 작가는 햄릿의 고독은 ‘흥미롭다’고 했으며, 함익의 고독에 대해서는 ‘독특하다’고 정의했다. 

고독의 성격을 흥미롭다, 독특하다로 구분할 수 있으려면 두 등장인물이 각각 시공을 초월하여 전혀 다른 무대에서 드러내 보인 고독의 ‘정체’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햄릿의 고독은 ‘무의식 세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다. 최종철은 “햄릿에게는 유령(아버지)의 원수인 왕(삼촌)을 죽여야 할 모든 합당한 이유가 충분하고 또한 왕을 해치울 명분과 의지와 힘과 수단까지 있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그에게 왕을 죽이지 못할 또는 않아야 할 생각은 적어도 그의 의식세계에서는 추호도 없다”고 분석했다.(셰익스피어전집4 '햄릿' 역자서문, 민음사, 2018) 최종철은 이어 “하지만 그의 무의식 세계는 다르다. 거기에서 양심은 햄릿으로 하여금 그가 곧바로 복수 행위에 돌입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 결과 햄릿의 무의식적인 양심은 그가 왕을 죽여야 할 때 그에게 엉뚱한 이유를 들어 그의 행동을 지연시킨다”고 썼다. 유령의 말이 진실인지 알아봐야 한다거나 왕이 기도할 때 죽이면 그가 천당 갈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등의 엉뚱한 이유들은 양심을 이끌어내는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이며, 따라서 이 같은 햄릿의 무의식 세계(고독)를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함익의 고독은 ‘익으로 구성되는 세계’이다. 함익은 햄릿과는 달리 스스로의 의식을 동원해 익이라는 분신을 조형(造型)했다. 여기서 익의 역할은 함익을 현실에서 건져 올려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실어가는 날개이다. 거울 속 또 다른 나의 날개를 타고 나를 만나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결심하고 깔깔대는 함익의 고독은 그래서 분방하기까지 하다. 재력가의 맏딸, 영국 유학파 대학교수. 유물론적 세상에서 이 두 개의 타이틀만으로도 함익은 남 부러울 것이 없지만, 한 꺼풀 아래 들춰지는 현실은 본드를 마시고 익의 날개를 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우울하다. 엄마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계모에 의해 살해됐을 것이라는 의심은 현실의 모든 우울을 잉태하는 삼신할미이다. 집에서 기르는 원숭이가 자살한 엄마의 시신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는 정황이 그 의심을 확신하는 강력한 단서인데, 함익이 꿈꾸는 복수는 그저 익을 만나(즉, 혼자서) “복수하고 말거야”라는 결심만을 무한 반복하는 데 그친다. 햄릿의 고독은 아버지의 복수로 가득 차 있지만 함익의 고독에는 엄마의 복수 뿐 아니라 제자 연우에 대한 짝사랑 등 자신이 내적 갈등에 휩싸인 모든 것들로 채워져 있다. 엄마의 복수를 맹세하면서 동시에 짝사랑을 이뤄보기 위해 애쓰는 함익의 고독이 그래서 독특한 것인가. 

마지막 장면
마지막 장면

 

비극은 슬픔과 죽음이라는 두 요소를 핵심으로 한다. 관객(독자)들에게 주인공 또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연민(슬픔)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결국 주인공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햄릿을 비롯해 모두 6명의 등장인물이 죽는다. 창작극 '함익' 역시 관객들을 들뜨게 하기 보다는 슬프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극이 분명하다. 또한 함익이 죽음을 택함으로써 비극적 요소는 완성된다. 따라서 '함익'의 마지막 장면을 놓고 ‘자아의 완성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명장면’이라는 일부 평론가들의 해석은 비극으로서 '함익'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간과한 것으로 명백한 오류이다. 

'함익'의 클라이막스는 함익이 원숭이를 죽이는 장면. 함익은 집안에서(아버지, 계모, 이복동생이) 애지중지 기르는 원숭이를 죽임으로써 익과 함께 수도 없이 맹세했던 엄마의 복수를 마침내 실행하고 완수한다. 사랑의 상념처럼 재빠른 날개로. 이는 아버지와 계모에 대한 철저한 복수 행위이며, 연우에 대한 짝사랑까지 끌어들였던 자신의 ‘독특한’ 고독을 깨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원숭이의 이름이 하필이면 ‘햄릿’인 이유는 '햄릿'을 사랑했고 ‘햄릿일 수’밖에 없었던 함익이 원숭이 햄릿을 죽임으로써 지긋지긋한 자신의 고독을 그렇게 살해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더 이상 익을 불러내는 거울이 필요 없게 된 것과 같은 상황이며 엔딩에 함익이 익의 손을 잡고 춤추듯 걸어갈 때 주변인물들이 모두 스러짐으로써 진행형에서 완료형으로 천천히 전환된다. 

 

작가 김은성은 함익의 고독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고독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함익은 익을 통해 고독을 말하지만 말하는 것은 익이 아니라 함익의 욕망이다. 복수에 불타는 햄릿의 욕망, 연우를 짝사랑하는 줄리엣으로서의 욕망,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로부터 끝없이 달아나고픈 욕망. 하지만 이 어느 것 하나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함익의 고독은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독과 닮았다. 여기서 우리는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욕망이론’을 떠올리게 된다. 목마르면 물을 찾는 것과 달리 아무런 특정의 대상이 없는 욕망, 그래서 욕망의 대상은 결핍이며 결코 만족을 모르고 채워질 수도 없는 것이다. 현대인이 고독한 것은 명품백을 사고 또 사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에 이름’(열린 책들, 이윤기 옮김, 2017)에 등장하는 유명한 표현과도 같이 ‘불 맞은 배암처럼 욕망과 번뇌 속에서 자반뒤집기를 하고 있’는 중이리라. 

 

‘죽느냐 사느냐’는 '함익'에서 ‘죽어 있느냐 살아 있느냐’로 틀을 바꾸었다. 의지작용의 방향의 문제일 뿐, 사실 욕망과 번뇌의 변주라는 점에서 둘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죽어 있느냐 살아 있느냐’가 되자 무대 위 햄릿만의 번뇌였던 것이 객석의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배분되어 잠깐이나마 삶을 성찰하는 단초로서 작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과연 나는 살아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한 것만으로도 창작극 <함익>의 메시지는 긍정적이다. 살아져온 삶을, 각본대로의 삶을 살다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들과 맞닥뜨려서는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선택하는 함익을 본 뒤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들이 자못 진지했으리라.

 

2016년 9월 초연을 올렸던 '함익'은 2년 반 만인 지난달 12일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가 28일 다시 막을 내렸다. 수작(秀作)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마지막에 함익이 벗어놓은 구두처럼 찬란한 여운이 기약 없는 기다림의 표상 같다. 

(본 비평은 4월24일 공연을 관람한 뒤 작성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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