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서로 죽여야 했던’ 비극의 오키나와
‘가족끼리 서로 죽여야 했던’ 비극의 오키나와
  • 홍민영 기자
  • 승인 2019.04.1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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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전투로 주민 12만명 희생돼
일본군 총알받이 이어 자살 강요까지
눈부신 섬, 오키나와. (Pixabay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눈부신 섬, 오키나와. (Pixabay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그린포스트코리아 홍민영 기자]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의 막이 올랐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일본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작가 김연수는 말했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파괴하는 자유를 선택한다.”

전쟁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파괴 행위다. 귀중한 인적 자산, 물적 자산이 한 순간에 재가 되는 것은 물론 승리의 미명 아래 수많은 악행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인류의 정신까지 파괴한다. 

태평양전쟁의 끝을 그린 '오키나와전투'도 그렇다. 오키나와전투는 태평양전쟁의 가장 큰 전투이자 일본의 배수진이었다. 이 전투로 10만명 이상의 오키나와 주민이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을 막는다는 명목 하에 잔인하게 희생됐다. 

주민들을 희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일본군이었다. 

오키나와전투 개요.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오키나와전투 개요.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미군의 상륙, 저지하는 일본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일본 본토 침공을 서둘렀다. 미군의 다음 목표는 오키나와였다. 오키나와를 전진기지로 삼아 본토에 진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일본군은 오카나와를 최후의 보루로 삼고 방어에 나섰다. 오키나와가 무너지면 본토도 넘어가게 된다. 전쟁을 끝내려는 미군과 본토 점령만은 막겠다는 일본군의 격돌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게라마(慶良間)제도를 공격했다. 이곳은 닷새 만에 미군에 점령됐다. 

1945년 4월 1일 마침내 미군이 오키나와 본토 중부 서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오키나와에 모인 미군 함대는 약 1500척. 지상 전투부대만 18만명, 해군부대와 보급부대까지 합치면 55만명에 달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약 10만명이었고 이중 일부는 현지에서 징집한 보조병력이었다. 애초에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서로의 목표만 달랐다. 미군의 목표는 한시라도 빨리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것이었고, 일본군의 목표는 미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섬 내부의 험준한 요새로 미군을 유인하는 지구전을 택했다. 섬이 남북으로 나뉘고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은 총탄 271만6691발, 포탄 6만18발, 수류탄 39만2304발, 로켓 2만359발, 기관총 탄환 3000만발을 이 작은 섬에 퍼부었다. 격렬한 함포 사격은 지형 일부를 바꿔놓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철의 폭풍’이라 불렀다. 

일본군에게 살아서 본토로 돌아가는 길이란 없었다.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규정 아래 패잔병들의 집단 자살이 이어졌다. 해군 사령관과 4000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끊기도 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도 투입됐다. 특공대로 선발된 젊은이들은 전투기를 몰고 미군 함선으로 돌격했다. 이렇게 죽어간 청년들이 1000명이 넘는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끔찍한 전투는 그 해 6월 말, 수세에 몰린 일본군 사령관이 할복자살한 뒤에야 끝이 났다.

오키나와는 미군의 손에 떨어졌다. 

미군에 수용된 오키나와 주민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미군에 수용된 오키나와 주민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주민의 희생

80여일 간 이어진 전투는 수십 만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미군측 사망자는 1만2520명, 일본측 사망자는 18만8136명으로 공식집계됐다.

이중 오키나와현 출신이 아닌 일본군은 6만5908명, 오키나와현 출신 군인과 학도병 등은 2만8228명, 일반 주민은 9만4000명이다. 총 12만2000명 이상의 주민이 희생된 것이다. 오키나와 전체 인구의 4분의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 외에도 위안부 등 1만여명이 더 희생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사항은 파악되지 않았다.

오키나와 주민들 중 상당수는 명목상 아군인 일본군에 의해 희생됐다.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琉球)라는 독립 국가였다. 류큐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중국와 일본, 한국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류큐가 일본의 침입을 받아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편입된 것은 1879년, 전쟁으로부터 고작 60여년 전이었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반발심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을 ‘3등 시민’이라 부르며 철저히 차별했다. 일본군에게 그들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3만9000명의 주민들을 징집해 제대로 된 훈련도 없이 무기를 들려주었고 남학생 1500명의 학업을 중단시킨 후 의용대에 포함시켰다. 일본군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희생을 요구했다. 200여명의 여학생들은 히메유리(姬百合) 학도대에 편입돼 간호원으로 일했다. 이들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은 이렇듯 오키나와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쓰는가 하면 나중엔 “살아서 치욕을 당하지 말라”며 자살까지 강요했다. 주민들은 일본군이 쥐어준 수류탄을 터트리거나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서로를 찌르고 목을 졸랐다. 동굴에 피난해 있던 주민들은 미군에게 들킬 것을 우려한 일본군의 강요에 의해 젖먹이의 입을 틀어막아 죽였다.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의 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이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교과서는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고 쓰고 있다. 

또한 “총알받이로 내몰린 오키나와 주민,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 온 한국인‧대만인 등 식민지 주민, 군국주의에 세뇌당해 스스로를 소모전에 바친 어린 병사들이 이 전쟁의 희생자”라고 지적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새겨져 있는 희생자들의 이름.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새겨져 있는 희생자들의 이름.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전쟁의 끝

지옥 같은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키나와에서 상처뿐인 승리를 얻은 미군은 본토를 침략할 경우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을 우려했다. 미군은 전쟁을 종결시킬 방법으로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고 순식간에 수 만명의 국민을 잃은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종전 후 70여년이 흘렀지만 오키나와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오키나와에는 아직도 23톤의 불발탄이 남아 있고, 1톤의 폭탄도 6건 이상 발견됐다.

주민들이 입은 상처는 더 아프다.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쟁의 방패막이로 사용한 것도 모자라 1952년에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통해 오키나와 지배권을 미국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1972년 다시 일본에 반환될 때까지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키나와에도, 일본에도, 미국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국적 없는 유령처럼 살아야만 했다.

1975년 현재의 일왕인 아키히토 왕세자 부부는 오키나와를 방문했다가 화염병을 맞았다. 오키나와해방동맹준비위원회 소속 회원 3명이 던진 화염병이었다. 당시 수 만명의 주민들이 파업과 시위를 통해 왕세자 부부의 방문을 반대했다.

2013년에는 오키나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가 발족됐다. 이들은 주민투표 과반수 찬성을 얻어 독립을 선언하고 유엔(UN)에 가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오키나와의 완전 독립을 꿈꾸는 것이다. 

공식 석상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 오키나와 출신 연예인들도 있다. 1990년대 일본을 뒤흔들었던 유명 가수 아무로 나미에는 일왕 즉위 10주년 축하 행사와 G8 정상회담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해 우익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북부 헤노코(辺野古) 앞바다를 메워 미 공군기지를 건설한다는 방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주민들과 환경단체는 “산호초와 천연기념물인 듀공의 생태가 심각하게 파괴된다”고 반대 시위를 벌였다. 지난 2월 있었던 주민투표에서는 지역주민의 71.7%가 반대에 표를 던졌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투표 결과를 무시하고 사업을 진행시키겠다고 했고, 주민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마음의 상처는 낫지 않았다. 

오키나와의 상징, 시샤. (Pixabay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오키나와의 상징, 시샤. (Pixabay 제공)/그린포스트코리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평화의 힘을 믿고 있다. 

오키나와 남부 마부니(摩文仁) 언덕에는 평화기념공원이 건립돼 있다. 60만평의 넓은 부지에  전쟁 희생자 24만1468명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오키나와현 주민 14만9456명, 타 지역 일본인 7만7425명, 미국인 1만4009명, 영국인 82명, 대만인 34명과 함께 한국인 380명과 북한인 82명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평화기념공원 홈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오키나와의 마음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체의 행위를 부정하며, 평화를 추구하면서, 인간성의 발로인 문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에 따라 국적, 피해자, 가해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희생자의 이름을 새겼다. 

오키나와전투가 종료된 매년 6월 23일이면 그곳에서 평화위령제가 열린다.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함께 평화를 바라는 물결이 오키나와 전체로 퍼져나간다. 

작가 김연수는 말했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파괴하는 자유를 선택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인간은 타인을 용서하고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 인류는 이 세 개의 명제를 밟고 서 있다.”

이 말처럼 오키나와는 파괴와 평화, 용서를 대변하고 있다.  

hmy10@green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