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납품실적 없이 등록 기술평가로 적합성 판단 '유일'
CFVS 유효성도 논란… 가동 전체 원전에 설치는 한국 뿐

 

후쿠시마 원전사고 모습 [사진=환경TV DB]
후쿠시마 원전사고 모습 [사진=환경TV DB]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 감압설비인 격납건물여과배기계통(CFVS)을 놓고 여러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그린포스트코리아>는 지난 20일 '한수원, 원전 설비업체 선정에 왜 '무리수' 뒀나'라는 기사에서 CFVS 공급자로 무자격 업체가 선정됐다는 의혹과 함께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이 업체를 밀어주려고 납품실적을 무리하게 짜 맞춘 게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한수원은 곧바로 반박했다. 한수원은 CFVS 공급자인 BHI가 공인기관 성능시험에 합격한 만큼 자격을 갖췄다면서 업체 선정이 정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수원 주장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CFVS를 둘러싼 여러 의혹을 종합적으로 살펴봤다.

◇한국 원전이 CFVS를 도입한 까닭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지방을 관통한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현에 위치한 원전에서 방사능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설계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원자로 폭발에 의한 중대사고로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핵. 세계는 탈원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원전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자 한국은 CFVS 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국산화 기술개발 과제를 추진했다. CFVS는 중대사고로 격납건물 내부의 압력이 높아질 때 원자로 내부의 방사성 물질을 여과해 대기 중으로 방출하는 방법으로 원자로 폭발을 막는 배기·감압설비다. 압력이 올라가면 김을 빼주는 압력밥솥의 원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독일·스위스·대만·이탈리아 등 선진국이 탈원전 정책을 모색하는 동안 국내는 중대사고 대비에 힘을 실었다 "원전의 안전성을 높이라"는 목소리는 탈원전 기조에 똥줄이 타던 원자력계에 전화위복으로 작용했다.

현재 국내에서 가동중인 원전은 23기, 건설중인 원전은 6기, 사실상 영구정지된 원전은 2기다. 이중 절반은 울산지역 인근에 몰려있지만 다수호기 사고 대비는 지금껏 전무한 실정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중대사고 관련 예산은 6000억원 가량, 가동원전 모두 설치를 목적으로 한 CFVS 구매 및 기술개발 관련 예산은 1600억원에 이른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안전을 명분으로 거액의 사업비를 원자력계로 끌어 올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미래와도전(CFVS 설계사)은 한국원자력연구원(이하 원자연), BHI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4년간 CFVS 기술개발 정부과제를 진행했다. 과제는 2017년 5월 31일에 종료됐고, 기술용역 계약업체였던 BHI가 신청 19일만에 CFVS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한수원이 공급자 선정 근거로 제시한 심사자료는 ‘허위’

CFVS 공급사 선정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해 9월부터 불거졌다. 한 민원인이 한수원에 440억원 규모인 표준형 원전 12기 CFVS 제작구매 계약의 해제를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했다.

민원인은 납품실적이 없는 BHI를 공급자로 낙찰한 건 공급자 관리지침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국회의원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자 한수원은 BHI가 납품실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BHI가 스위스 시험기관(PSI)에 제공한 ‘유사품’을 납품실적으로 제출했으며, 원자연이 종합성능검증시험을 수행해 조건을 충족했다고 설명했다. 한수원은 원전에만 사용하는 특수품목의 경우 공인기관 성능시험에 합격하거나, 한수원 입회 아래 성능시험을 통과하면 납품실적으로 인정한다는 규정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원자연이 공인인증기관이란 사실을 부인하면서 한수원 주장에 큰 틈이 생겼다. 원자연은 스스로 공인인증기관이 아닌 데다 시험증명서를 발급한 사실도 없다고 밝혔다. 원자연 관계자는 <그린포스트코리아>와의 전화통화에서 “원자연은 인증기관이 아니라 연구기관이다. 미래와도전의 요구로 관련 데이터를 제공한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원자연 입장을 받아들이면 한수원이 공급자 선정 근거로 제시한 심사자료는 허위인 셈이다. 

이 같은 과정을 두고 일각에선 CFVS 국내 기술 개발이 사실상 ‘사업비 나눠먹기’라는 지적까지 하고 있다.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민원인은 BHI가 기술개발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평가시 실제 제품 아닌 ‘축소모형’ 놓고 판단

원자로 감압설비 공급자로 무자격 업체인 BHI가 선정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한수원은 즉각 반박했다. 한수원은 BHI가 공인기관 성능시험을 통과해 자격을 갖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수원의 주장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한수원이 지난 21일 낸 입장문을 보면 BHI가 원자연에서 종합성능검증시험을, 스위스 시험기관(PSI)에서 제3자 성능검증시험을 수행해 CFVS 설비 계약을 위한 기술능력을 갖췄다고 밝혔다. BHI가 설비 공급 유자격자 인증을 통과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CFVS 공급자 선정 당시 한수원은 BHI가 PSI에 제출한 시험설비를 '유사품목 납품실적'으로 보고, 원자연 시험결과만 공급자 평가자료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BHI가 PSI에 공급한 CFVS 설비도 축소모형이었다. 한수원은 BHI가 성능검증을 위해 PSI에 CFVS 축소모형을 보낸 것을 ‘납품’한 것으로 간주하고, 원자연은 유사품에 불과한 축소모형의 성능을 시험했다. 이 과정을 거친 뒤 한수원은 BHI가 조건을 만족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산업부의 ‘에너지 R&D 중장기과제(2014~2017)’ 공고문에는 최종결과물이 '여과배기계통 시제품'으로 명시돼 있다. 이 때문에 부산환경운동연합은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한 상태다. 

◇원자연은 ‘필터’ 성능 검증 자격을 갖췄을까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 번째는 성능 검증을 위해 PSI에 공급한 것을 과연 납품실적으로 볼 수 있느냐다. 이에 대해 한수원은 "원전에만 사용하는 특수품목인 경우 공인기관 성능시험에 합격하면 이를 납품실적으로 인정한다"는 사규를 근거로 적법성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또 원자연을 공인기관이라 볼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 한수원은 "CFVS 관련 품목은 아니지만 원자력 관련 품목을 한국인정기구(KOLAS)로부터 인정받았으므로 국제공인시험기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CFVS 설비의 핵심은 필터와 고압탱크다. 필터는 방사성 물질을 여과하는 역할을, 고압탱크는 원자로 압력을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수원 자료에 따르면 원자연은 BHI가 제출한 축소모형을 놓고 에어로졸(2016년), 원소요오드(2017년), 유기요오드(2017년)에 대한 제염 계수(DF) 등을 검증했다. 쉽게 말하면 사고 발생시 방사성 물질을 얼마나 잘 제거하는지 필터 성능을 검증했다.

그러나 원자연이 CFVS 필터 성능을 검증할 자격을 갖췄느냐에 의문이 남는다. 한국국가인증기관인 코라스(KOLAS)가 원자연을 대상으로 발급한 국제공인시험기관 인정서 규격에 ‘필터’ 품목은 없다. 과연 한수원의 주장대로 원자연이 배기·감압 설비와 관련해 국제공인시험기관 인정을 받진 않았지만 원자력과 관련해 다른 품목은 인정받았으니 국제공인기관이라고 볼 수 있을까.

2013년 신고리 1·2호기와 신월성 1호기가 멈춰서며 유착비리라는 한수원의 '고질병'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원전은 수백만개의 부품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돌아간다. 중고 부품을 새 부품처럼 납품하고 부품 품질인증서까지 위조하는 한수원의 납품비리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바 있다. 당시 조작된 시험성적서가 2010건으로 확인됐다. 해당 사건으로 김종신 전 사장, 송모 부장 등 한수원 관계자들이 ‘원전비리 쓰나미’에 휩쓸려 줄줄이 구속됐다.

이처럼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한수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원자연이 코라스로부터 인정받은 기존 규격 가운데 어떤 규격이 CFVS 설비의 필터나 고압탱크 등의 성능을 검증하는 데 유효한지 구체적으로 설명돼야 한다. 

원안연 관계자는 "코라스에 인증받은 것은 온도, 압력, 핵연료 등과 관련한 규격이지 필터는 아니다"라고 잘라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부터 원자연이 모든 원자력 관련 기술분야의 국제공인인증기관이 됐냐"고 반문했다.

◇해외시험기관 성능시험 결과 나오기 전 공급자 선정

두 번째 의문은 한수원이 왜 스위스 시험기관인 PSI의 성능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CFVS 공급자를 선정했느냐다.

CFVS 설비계약의 기술규격서 시험요건을 충족하려면 기술개발과제인 원자연이 실시한 '종합성능검증시험'과 PSI가 실시한 '독립성능검증시험'까지 두 개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취재 결과, 공급자 심사 당시 PSI 성능검증시험이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공급자 선정 평가를 진행한 것이다.

BHI는 평가에서 90.6점을 받아 CFVS 품목 공급 적격자가 됐다. 적격 판정을 받으려면 합계점수 80점 이상 획득해야 하는데, 실제 납품실적 없이 기술심사 판정 기준만으로 적격 판정을 받은 것은 CFVS가 유일했다. 

점수 산정에 대한 공정성도 의심할 여지가 있다. 한수원은 PSI에 보낸 시험설비를 납품 실적으로 보고 평가 점수에 포함했다. 이에 대해 한수원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납품실적을 0점으로 처리해도 공급자 선정을 위한 종합득점이 가능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검증을 위해 해외기관에 축소모형을 보낸 이력이 납품실적으로 평가됐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한수원이 처음부터 BHI를 밀어주려고 작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수천억원을 투입하는 설비 공급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이 단 19일만에 이뤄진 점도 이 같은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다. 

◇CFVS 효용성 놓고도 엇갈린 판단

CFVS를 두고 0.01%의 사고 대비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전문가도 있고, 불필요한 설비에 세금을 낭비한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CFVS 효용성을 놓고도 판단은 엇갈리지만 CFVS 유효성에 대한 의심은 이미 내부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월성 2·3·4호기 예비평가 결과 중대사고 선량기준 충족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평가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동 원전 모두에 CFVS를 설치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안연 소속 박종운 동국대학교 교수는 "원전사고를 겪은 일본도 CFVS와 같은 감압설비를 전 원전 의무설치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라며 "다른 나라의 경우 안전성과 경제성을 모두 고려한 최적안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하는데 국내는 성급하게 추진돼 온 감이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수백억을 호가하는 설비를 국민안전을 위해 설치하기로 했으면,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성능을 제대로 검증했어야 했는데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하니까 '부실검증' 논란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ya9ball@gree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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