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규범을 만들지 못한 탓에 ‘멀쩡한’ 우리가 휘둘리는 참담함

넷플릭스의 TV드라마 '킹덤'의 시그니처 장면. [사진=넷플릭스 홈페이지 화면 캡처]
넷플릭스의 TV드라마 '킹덤'의 시그니처 장면. [사진=넷플릭스 홈페이지 화면 캡처]

요즘 인기 있는 넷플릭스의 TV드라마 '킹덤(Kingdom)'은 멀쩡한 사람이 좀비로 변하는 몹쓸 역병이 무능한 왕으로부터 시작되는 서사구조로 짜여 있다. 두창에 걸린 왕을 치료하던 의원의 시중이 좀비가 되어 있던 왕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그 시중의 시체를 사슴고기인줄 알고 나눠 먹은 의원의 환자들이 좀비가 되어 산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역병이 급속도로 확산한다. 다른 좀비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에서도 좀비들의 속성은 살아 있는 사람만을 타깃으로 한 무조건적, 무차별적 공격성이다. 주인의 발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산 사람만 보면 순식간에 떼를 지어 달려들어 살을 물어뜯고 피를 탐한다. 좀비들에게 있어 존재의 목적은 모두를 좀비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산 사람 모두가 좀비가 되고 나서야 좀비 역병의 전염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 때 사람은 없고 모두가 좀비이니까.

상상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좀비 역병이 도는 세상이란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좀비라는 괴물의 공격을 받아 곁에 있던 멀쩡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괴물로 변해가는 일을 목도하고 그 괴물들을 피해 끊임없이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어 모두가 도리질치겠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이런 괴물들이 살고 있고 역병이 돌고 있다. 제1야당이라는 수식어가 아까운 어느 당의 당대표 후보들이 쏟아내는 언설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가 선 채로 괴물들에게 물어뜯기는 킹덤 속 의녀(醫女)가 된 것 같아 참담함을 떨쳐낼 수 없다(킹덤의 캡처화면 참조). 그들이 토해내는 소리들은 전혀 이 시대 이 나라 사람들의 그것 같지가 않고, 산 사람을 뒤쫓는 괴물들이 뱉어내는 밭은 소리로 웅웅댈 뿐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태극기부대의 주장을 여과 없이 확성(擴聲)하는 그들이 무능한 왕으로부터 시작된 역병에 새빨갛게 물든 드라마속 그들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내체남불’(내가 하면 체크리스트 남이 하면 블랙리스트)이라는 새로운 유행어의 당사자들도 도긴개긴, 별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전 킹덤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 강변(强辯)이 오히려 유사함을 도드라지게 한다. 그들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역병에 감염되어 모든 사건과 현상과 상황의 이유를 그것으로 돌리고 쉽게 입을 닦고 손을 턴다. 이전 킹덤의 괴물들이 날조와 왜곡으로 자신들만의 도그마를 만들어 우르르 몰려가듯이, 지금 킹덤의 그들은 내로남불과 ‘마녀’ 프레임으로 이리 쏠렸다 저리 쏠렸다 한다. 우리 편을 구속한 판사는 ‘나쁜 놈’이고 그래서 재판불복이 마땅하다는 그들,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백년집권’ 운운하는 그들, 실업률은 최악의 수치를 경신했는데도 무능의 청사진만 복사기에 넣어 돌리는 그들. 내 눈에는 그들이 이전 킹덤의 그들과 이란성 쌍둥이로 비칠 뿐이다. 여러 괴물들의 소란한 소리들을 들어야 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우리는 촛불혁명을 통해 열린 광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공적 공간으로서 광장의 규범을 갖는 데는 실패했다. 규범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광장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 그리하여 이전 킹덤의 감염자들이 광화문 사거리에서 1968년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을 낭독하는 장면을 ‘멀쩡한’ 우리가 지켜보느라 곤욕을 치른다. 자신들의 리더를 법정구속한 판사를 향해 광화문 사거리에서 스피커로 쌍욕을 해대는 무리들의 행진에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난감함에 ‘멀쩡한’ 우리가 쩔쩔 매야 한다. 촛불을 들었던 우리가 이전 킹덤의 시대착오적 '향수병'이 발 붙이지 못하도록, 새로운 킹덤의 오만불손한 역병이 광장의 완장을 찬 양 행세하지 못하도록 애초에 단호한 규범을 세웠더라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다. 다시 드라마 얘기로 돌아오면, 그러나 괴물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결국 ‘멀쩡한’ 사람들에 의해 다시금 깨끗하게 청소되는 것, 그것이 정해진 결말이다. 예외는 없다.

(2019.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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